공(公)은 공암현에서 큰 부농(富農: 농토와 농사의 규모가 크고 수입이 많은 부자)으로 살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군을 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할 때 식량이 부족하고 병사가 매우 피로해 있었다. 이에 공(公)이 왕건의 사람됨을 보고 많은 식량을 흔쾌히 지원하니 왕건의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견훤군을 물리쳤다. 당시 공(公)의 나이가 99세인데도 용모가 훌륭하고 기개와 도량이 컸으며 정숙하였다.
태조 왕건이 공(公)의 충의(忠義: 충성과 의리)에 감동하여 공(公)을 가부(假父)로 받들며 공암촌주(孔巖村主)로 봉(封)하고 공암현(孔巖縣)을 식향(食鄕)으로 내리니 공(公)은 이로 말미암아 관적(貫籍: 본적)을 공암 허씨(孔巖許氏)로 했다.
공(公)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단일 국가로 만들어지는데 공이 많았다하여 고려 태조 왕건 시절 『고려개국 삼한공신(高麗開國三韓功臣)』으로 책록(策錄: 공식적으로 문서에 기록함)되었는데 공(公)의 집터는 속칭 장자(長子) 터라고 일컬어지는 소요정(逍遙亭) 근처에 있었다 하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태조 왕건 23(940)년 신흥사(神興寺)를 다시 수리하면서 신흥사 내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웠는데 공신당의 동쪽과 서쪽 벽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고려국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삼한공신(三韓功臣)』들의 화상을 그려 놓았으며 이 공신들을 위해 복(福:행복)을 비는 대회를 해마다 열고 이들의 자손에게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내리게 했다고 한다.
『삼한공신』으로 책록된 시조 허선문의 화상도 공신당에 그려졌는데, 이들의 화상이 공신당 벽에 그려졌다 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도 불리워졌다. 고려 건국의 1등 공신으로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전(傳)》에 의하면 고려 태조 23년 12월 『삼한공신』으로 이총언(李悤言), 권행(權幸),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季弘), 나총례(羅總禮), 이희목(李希穆), 염나명(廉那明), 최필달(崔必達), 김홍술(金弘述) 등이 신흥사 공신각에 도형(圖形: 그림) 되었다 한다. 현재 이 화상들은 불행하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